나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었다. 유창하다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영어 시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대학도 영어 성적 때문에 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공대생 주제 수학은 잘 못했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선행학습 따위는 없었다. 초등, 아니 국민학교 시절 알파벳송 정도는 흥얼거렸던 것 같다. 딱 거기까지 였다.
중1 담임은 아버지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특별하게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고, 학교에 입학하여 부모님이 상담하러 학교에 들러서 인사를 나누다가 알게 되었다. 국어 선생님이었다. 체격이 크시고, 꽤 젠틀한 타입이셨다. 나름 언어 쪽에 재능이 좀 있었는지, 국어를 잘했다. 게다가 글재주가 좀 있어서, 참여하는 백일장마다 상을 받고, 대통령상까지 받기도 했다. 비록 전두환이었지만...
영어 첫 수업은 알파벳을 칠판 가득 써놓고, 따라 쓰는 것이었다. 영어 전용 노트에 알파벳을 따라 쓰며 외우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요즘이야 유치원부터 영어 교육을 시키니 중 입학 때까지 알파벳도 안 써보고 입학하는 중학생은 없겠지?
그렇게 알파벳을 외우고 쓰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일반체에서 시작하여 필기체까지 배웠다. 특히 필기체 수업은 펜과 잉크로 진행되었다. 만년필도 아닌 펜과 잉크라니.. 다시 생각해 보니 낭만 제대로였다. 나는 특히 펜으로 필기체 쓰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잉크를 콕콕 찍어가면서 필기체로 써내려 가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교과서의 첫 문장은 그 유명한(?) "I am Tom."이었던 것 같다. 이른바 국정교과서라고 하여, 문교부에서 일괄 제작하여 전국의 모든 중1이 같은 교과서로 배우던 시절이었다. 처음 배우는 외국어였기 때문이었는지 제법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영어 잘하는 법에 관한 몇 가지 황당한 전설 같은 이야기 중에는 영어를 잘하려면 사전을 통째로 다 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 장 a부터 시작하여 다 순서대로 외우고, 다 외운 페이지는 찢어서 먹어 버려야 한다는 다소 엽기적인 영어 학습 성공담이 있었다.
알파벳을 익혔으면 단어를 외우는 것이 영어 공부의 출발점이었다. 스펠링을 외우고, 뜻을 외우고... 문제는 발음이었다. 영어 발음을 익히려면 결국 영어 선생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혹시라도 선생님의 발음이 너무 구리다면 개폭망각이었지만 사실 선생님의 발음이 구린지, 어떤지 비교할만한 대상도 없었다. 문제는 예습이라도 할라치면 영어 사전을 찾아봐야 했는데, 일단은 영어 사전 찾는 법에 익숙해져야 했고, 두 번째로는 발음 기호를 알아야 했다. ~tion의 발음이 때로는 션, 혹은 쳔 등등 다양하게 발음되니, 사전의 각 단어에는 반듯이 발음 기호가 첨부되어 있었고, 그 발음 기호를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알아야만 했다. 발음 기호는 학교 교과 과정에는 없었다.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 학습을 해야 했다.
당시 교과서 학습을 위해 판매되는 참고서에는 영어 문장 밑에 한글로 발음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면 "아이 엠 탐"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글로 뜻풀이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따로 영어 발음 기호에 관한 교재를 사서 공부했다. 이 발음 기호 학습은 마치 별도의 외국어를 하나 익히는 기분이었다. 발음 기호와 발음법 등을 한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발음 기호에 익숙해지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굳이 선생님께 의존하기 않고 혼자서도 영단어의 발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원어민 발음을 들어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일단 발음을 할 수 있게 되니 영어 단어 외우는 것이 더 쉬워졌다. 그제야 사전을 찢어 먹을 기회가 제대로 부여된 셈이다. 물론 나는 찢어 먹은 적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더럽잖아.
어쨌든 영어 학습에 있어서 사전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집에서는 좀 크고 두꺼운 사전을 이용하고, 책가방에는 작은 사전을 넣어 들고 다녔다. 형광펜으로 마킹도 하고, 그야말로 사전을 넘어선 참고서가 되었다. 기억 속에 중3 때 각 잡고 구매한 동아출판사의 프라임 사전을 고교 졸업 때까지 썼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 속의 학습 교재 중의 하나는 민병철 중학 영어 카셋 테이프이었다. 그야말로 원어민의 발음을 제대로 들어 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던 것 같다. 그야말로 닳고 닳도록 들었던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내 발음은 꽤 괜찮은 편에 속했다. 원어민 같은 유창함에 비할 바는 못되더라도 중3 정도에는 선생님의 발음보다 나았던 것 같다. 그래서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의 지시로 그 시간의 분량을 내가 항상 큰 소리로 읽었던 기억도 있다.
요즘은 영어 발음 기호를 굳이 공부하지는 않는 것 같다. 휴대폰에 전자 사전 앱도 있고, 굳이 앱이 아니더라도 네이버 등등의 웹 검색을 해보면, 뜻은 물론 발음까지도 다 해결할 수 있으니... 게다가 단어의 스펠링을 정확히 모르고 대충 집어넣어도 알아서 다 찾아 준다. 나도 고3 때 샤프에서 나온 전자사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기는 단어는 문제도 아니다. 이제는 문장 번역까지도 해주고 있으니... 최근 챗GPT 번역을 이용해서 영문서적을 좀 읽어 보았는데, 압도적이었다. 이제는 외국어 좀 한다고 힘 좀 쓸 수 있는 세상은 아닌 것 같다. 디지털화된 세상이니 그렇게 또 새롭게 적응해 나가면 될 것이다.
다만 인간의 학습 능력은 쓸수록 개발되고, 안 쓰면 퇴화되는 법인데... 확실히 예전의 아날로그적인 영어 학습법이 체화라는 측면에서는 오래가는 것 같다. 이제는 그 체화의 가치부터 재논의를 해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취미나 여행 가서 쓰는 영어정도라면 AI의 도움을 받아서 쓰는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프로페셔널이라면, 그걸로 밥 벌어먹고살려면, 역시 본인이 제대로 공부를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사이버 대학이나 방통대의 영어과에 입학해서 공부를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럭저럭 하는 영어이지만 늘 한쪽이 쉽사리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다. 여전히 기초가 부족하고,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언어라는 것이 그저 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너무 호사스러운 취미가 되려나?
마음 같아서는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패니시도 배우고 싶지만, 과한 욕심은 탈이 나는 법! 요즘은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도 더러 만날 수 있는 시대이고, 우리가 어렸을 때 영어 학습을 위해 무턱대고 서양인을 붙잡고 늘어지던 시대처럼, 한국인을 만나서 한국말을 학습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으니, 가벼운 소통을 위해서라면 한국어로도 충분할 수도 있겠다.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어보다 한국어를 원어로 쓰는 인구가 좀 더 많다고 하니 한국어의 위상도 괜찮은 편이다.
다시 옛날 기억으로 되돌아가본다. 필기체, 펜과 잉크, 영어 발음 기호, 영어 사전 그리고 민병철 영어 테이프...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내 젊은 시절 먹고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들이다. 그렇게 도움 받을 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수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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