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 4일 월요일 맑음 2140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다. 패배감을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긴장된 하루하루가 힘들게 지나간다. 이것이 아니었는데, 세상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하루가 빡빡하다.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니고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요즘의 시간은 사실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무 것도 없다. 일과의 대부분은 시키는데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저 5시 퇴근이 큰 위로이지만, 종종 그것도 못할 수 있으니까...
1990년 6월 7일 목요일 맑음 2150
205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 1분대
자대에 배치된지 어느새 한 달!
정신없이 어찌어찌 지나가고 있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일상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저 맨처음의 황망함은 이제 좀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아직도 현실감이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모든 부분이 역부족이다.
오늘은 화생방 교육이 진행되었다. 가스실까지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 유격 때나 벌어질 일이다. 오전은 내무반 교육! 오후에는 산에 올랐다. 훈련소에서 써보고 쓸 기회가 없었던 방독면을 반복해서 썼다 벗었다. 중요한 것은 신속하게 방독면을 쓰고 주변에 전파할 것! 가스! 가스!! 가스!!!
늘 오늘 같은 일과라면 좋겠다. 다만 8기가 7기에게 개기는 바람에 중대 분위기가 개똥이 되었다. 아, 강일석 일병! 아무리 방위라지만 어떻게 입대를 했는지 미스터리 하다.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동기들이 그를 정말 많이 돌봐주는 것 같다.
1990년 6월 8일 금요일 흐리고 비 2350
부대는 제대로 된 것이 전혀 없어 보인다.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이 움직이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2시간을 이동했다. 단독군장이었지만 일종의 행군! 이라고 하기에는 가벼운 산보!! 진접이라고 했나? 어느 산 중에서 하루 종일 동안 잠복 아닌 잠복을 하였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가는 길인데 비행기 운항 경로가 근처란다. 그래서 적기 출현에 대비하여 지상 잠복근무를... 날아가는 비행기에 화망을 구성하여 떨어 뜨리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지상에서 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에 소총을 쏴서 잡는다고?
현실은 그저 비를 맞으며 분대 별로 산 속에 짱 박혀 있었다. 되지도 않는 잡소리나 해대면서...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꾸벅꾸벅 졸다가 경계 근무도 섰다. 지나가는 사람은 시골의 촌부들뿐이었지만 혹시 올지도 모를 적들을 대비하여 경계했다. 그리고 다시 지시에 따라 복귀!
그야말로 속옷까지 쭈아악 젖었다. 내무반에서 군장 속에 싸놓은 속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군복과 속옷을 싸들고 퇴근했다. 이미 수송버스는 놓쳤다. 부대를 걸어서 정문으로 퇴근했다. 생각해 보니 사단 정문을 걸어서 통과한 거는 오늘이 처음이다. 수송버스는 언제나 부대 안까지 진입해서 연병장에서 타고 내리니까...
호준과 3기 몇 명이랑 문필주 일병과 함께 잠실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탔다. 그래도 퇴근할 때는 모두 기분이 좋다. 그러다가 다시 내일 출근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
오늘은 무엇을 한 것이냐? 기억나는 거는 비 맞은 것뿐이네. 신병으로서는 차라리 좋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1990년 6월 15일 금요일 흐리고 비 2135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
일주일 내내 뭐 했게? 사격! 눈만 뜨면 사격!!
사단 평가를 위한 사격 측정이 있단다. 그래서 사격 훈련이 시작되었다. 측정은 추후 일개 대대가 선정되어 진행되는데 어느 대대가 선정될지는 알 수 없다. 훈련 기간은 대략 한 달!! 이제 출퇴근 시간은 의미가 없겠다. 아니 퇴근 시간만이 의미가 없다.
사격 자체보다도 힘든 것은 PRI, 즉 사격술 예비 훈련! 총기번호 148653!! 제발 말 좀 잘 들어라. 목식 자동화 사격장까지의 이동도 만만치 않다. 뭐 대략 4킬로 정도의 거리이기에 도보로 1시간! 물론 편한 길 아니고 진흙길이다. 매일 왕복 2시간의 행군!이라고 우기기에는 가벼운 산보!! 그래도 큰 행군 한 번 뛰었다고 몸은 그렇게 적응한 것 같다.
오전에 사격장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마음은 무겁다. 오늘 또 얼마나 하루가 길겠어. 사격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고참들로부터 욕을 처먹고 얼차려를 받을 것이다. 고참들은 지나가다가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챙긴다. 늘 그래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병인 나는 잊지 말고 수통 채우기!! 나도 나지만 고참들을 위하여... 지쳤지만 복귀하는 오후는 발걸음이 가볍다. 퇴근이 다가오니 마음이 가뿐하기는 하다.
신교대를 마치고 자대 배치받은 이후에 처음 하게 된 사격이다. 평소에도 사격을 얼마나 자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처럼 측정을 목적으로 한 집중적인 사격 훈련은 드문 경우인 모양이다. 고참들도 지난 일주일처럼 사격을 많이 한 경험은 없다고 한다. 신교대에서 총소리를 듣고 그 온몸을 흔드는 반동과 고막을 찢어대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난 일주일 간의 사격 훈련으로 이제는 그 충격에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공포~~ 반동과 소음과 화약 냄새! 그리고 사선에 섰을 때 느껴지는 그 뜨거운 서늘함! 감히 전쟁터에 비유할 것은 아니지만 그 정재 된 혼돈의 긴장감! 도저히 말로는 충분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생각해 보면 신교대에서 처음 소총을 지급 받았을 때 조금 신났던 것 같다. 살면서 총은 처음 만져보는 것인데 지금부터 이것이 내 총이라고 하니 신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첫 실탄 사격은 충격적이기는 했다. 훈련소 동기 중에 종교적인 이유로 집총을 거부했다는 놈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충격적이었고 당황스러웠다. 총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이고, 또 수시로 닦아줘야 하는 귀찮은 존재이다. 아니지, 나를 지켜줄 나의 무기이다. 이제는 그것을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한다. 닦고 쏘고 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살아남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병기함에 총을 넣어두고 퇴근한다. 온몸에 화약냄새를 묻히고...
당연하겠지만 사격장은 민간인 출입이 불가하고, 산중턱에 잘 파묻혀 있어서, 총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 같다. 일주일 내내 사격을 하고 맞는 주말, 내 귓구멍에는 지금도 총소리가 울리고 있다. 이명인가? 미치겠네.
1990년 6월 16일 토요일 맑음 2550
일주일 간 혹사당한 내 심신에게 휴식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사격 지옥의 한 주가 지나갔어. 모든 중대원이 몹시도 피곤해했어. 나만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아직 겪어보지 못한 훈련이 훨씬 많지만 역시 사격 훈련의 특성상 지속적인 긴장을 유지해야 하다 보니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매우 피곤해지는 것 같다.
걱정은 그만하고 그저 여유를 가지자!!
1990년 6월 18일 월요일 비 2025
오늘도 사격!
비가 내리는 가운데 목식까지의 이동부터 거지 같았다. 논두렁 같은 흙길을 걸어가자니 워커에는 흙이 잔뜩 들러붙어 안 그래도 무거운 놈이 더욱 무거워져서는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전쟁이 날씨 가리는 것도 아니니까 비가 오는 날이라도 사격은 필요하지. 오늘은 저조자.. 타이틀을 걸고, 고참들에게 눈칫밥 먹었다. 비가 와서인지 표적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상탄인지 하탄인지 제대로 구분도 안 되는 지경이었다. 맑은 날에는 표적 주변의 먼지를 보면서 파악이 되기도 하는데 오늘은 전반적으로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추진된 점심 식사는 뭐 빗물인지 국물인지.. 어차피 똥국이니까 상관없다.
오후에 저조자 위주로 1차례 더 추가 사격이 있었다. 판초 우의를 걸치고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그나마 빨리 끝내고 복귀해서 소총 수입 진행! 사격 후라면 당연히 총기 수입이지만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반드시... 아니면 내일 사격을 못할지도 몰라. 그나저나 이토록 소총 관리가 힘든데 실전에서는 어떻게 쓰지?
비가 계속 왔으면 좋겠다. 눈치를 보아하니 비가 오면 사격을 좀 덜 할 것도 같다.
5기 신병이 왔다. 같이 어리바리 타는 거지 뭐. 이제사 신병 딱지를 떼고 이등병이 된다. 그나마 큰 훈련 뛴 기수라고 대우해 준다지만 어차피 작대기 하나의 이등병일 뿐이다. 그래도 또 한 달 짬밥이 어디라고... 나에게도 다나까를 붙이는 쫄다구들이 생긴 것이다. 몇 명 안되기는 한다.
1990년 6월 30일 토요일 맑음 2140
자그마치 2주일간 비가 오거나 흐리더니 오늘은 참으로 쾌청하다.
나는 이제 제법 적응해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익숙해진 두려움? 익숙해진 고통?
여전히 출근길의 마음 한쪽은 무겁다. 그러나 이제는 제법 주변의 것들도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그렇게 익숙해지고 있다. 여전히 고참들의 악다구니는 듣기 힘들고, 사격장의 총소리와 화약 냄새는 고약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두려움과 고통이 예측이 가능한 익숙함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고 편안하지는 않지만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으로 생겼던 두려움과 고통은 많이 사라졌다.
역시 사람이란 환경에 그렇게 익숙해지기 마련인가 보다.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하니까...
이등병들은 힘을 내라. 다음 주에도 사격 훈련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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