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5월 21일 월요일 흐림 2107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갔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그저 생존을 위하여 그렇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갔다.
공식적으로 지난 4월 9일부로 국방부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6주가 흘렀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 얼마나 괴로울지는 감히 상상조차도 못하겠지만 지난 4주간의 훈련소와 2주간의 자대에서의 시간, 특히 행군, 내가 살아왔던 지난 20여 년간의 시간이 다 뒤집어지는 문명의 대충돌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금학산 한 자락에서 야간 동초를 서며 하늘 가득한 별을 보며 잠시 감탄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철원 평야를 가로질러 달려 가는 자동차들을 보며 탈출하고 싶었다. 걸어온 길도 끔직했지만 그렇게 다시 걸어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암담했다.
100킬로인지, 200킬로 인지... 뭐가 달라? 뭐가 중요해? 어차피 한계치는 훨씬 넘어선 것인데.. 복귀 행군이 더 힘들었나? 뭐가 달라? 어차피 걸어본 적 없는 걸음이었으며, 먹어보지 못한 밥이었으며, 겪어보지 못한 추위였으며, 해본 적이 없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해서 문명 세계로 다시 돌아온 지 3일째이지만 나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으며 이곳에 속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눈만 껌뻑이고 있다. 내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평생을 살아왔던 도시의 불빛은 생각나지 않았고, 반짝이는 별빛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심란했다. 내 주변에는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들과 벌레와 먼지와 추위뿐이었다.
아마 냄새도 좀 낫겠지만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도 그 냄새를 풍기는 인원들 중의 한 명이니까... 잠실역에서 집으로 오는 시내버스 타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늘 일상적으로 타고 다니던 버스였는데... 그리고 오늘 나는 내가 지난 20여 년 동안 살아왔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너무 낯설다. 나의 내면은 커다란 스크래치가 생긴 것 같은데 이곳의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그렇게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구나! 나는 이곳이 그렇게 궁금했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궁금해했을 리가 없겠지? 나는 어떤 형태로든지 성장하고 있는 건가?
남은 17개월이 언제 어떻게 지나갈지는 상상도 못 하겠어요. 지나가겠지? 지나갈까??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없다.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겠지. 이를 악물고...
해나가야 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나의 동기들, 모두에게 너무 고맙다. 서로 간에 잘 알지도 못하고 나와 마찬가지로 서툰 신병들이었지만 크게 의지가 되고 도움을 받았다. 특히 형호가 부른 Diana는 강렬했다. 노래 잘하는구나.
1990년 5월 25일 금요일 그저 그런 날씨 1935
무엇인가가 무척이나 부담스럽다. 무엇인가가 아니지. 너무 명확하잖아!! 너무 뻔한 것 아니겠어?
시간이 흘러야 하고 그 와중에 나만 유난스럽게 구는 것도 같고.. 시작이 제일 힘들기는 하지.
새벽같이 일어나서 수송버스를 타러 달려가고, 하루 종일 긴장한 상태로 버티다가... 퇴근! 이 정도면 그냥 부대에 있는 게 나은 거 아닐까? 아니다. 그래도 퇴근하면 무섭고 더러운 꼴들 안 봐도 되니까... 혼자 TV 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내가 20년 동안 머물던 잠자리가 이렇게 어색한 거야. 왜 이리도 불편하고 불안한 거냐고...
일주일 내내 지난 몇 주간의 훈련 기간 동안 사용했던 장비를 정비하고 총기를 수입했다. 나머지 시간은 신병 대기! 부동자세로 눈알도 제대로 돌리지 못한 채 앉아 있어야 한다. 그래도 움직이는 게 나은 거 같아.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것은 또 다른 고문이었다.
연병장에 돌을 주우래. 열심히 돌을 줍는 중에 뒤통수 한 대 까였다. 열심히 안 한다고... 두 손으로 부지런히 줍지 않고 한 손으로만 줍는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아팠나? 아팠을 텐데 그 순간에는 못 느낀 것 같다. 눈물이 핑돌기는 했다. 아파서? 쪽팔려서? 근데 유 상병님이 와서는 나에게 지랄하던 김 일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고마웠다. 사람 좋아 보이는 유 상병님이 나보고 "할 줄 아는 게 뭐냐?"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야 뒤통수가 아픈 것 같다. 혹이 살짝! 뭐로 맞은 거지??
그래 처음은 힘들지. 피곤하지. 그게 그렇다니까... 불과 12시간 후에 나는 다시 부대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24시간 후에는 다시 이곳인가? 그리고 18개월 후의 나!!
힘을 내도록 하자. 힘이 안 나는데 힘을 내자!! 좋은 꿈만을 꾸고 좋은 일만을 생각하자. 불평은 하지 말자!!
91년 가을이나 어서 왔으면 좋겠다. 90년 가을도 멀었는데 무슨 소리인지.. 원
난 지금 그저 이병을 달고 한 달도 안 지났다. 죽자!!
1990년 5월 26일 토요일 맑음 2205
이얏, 토요일이야. 시간은 흐른다. 그렇게 흐른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행군은 자대 배치는 받았지만 대대 모든 신병들은 중화기 중대에서 별도로 지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주가 실질적인 자대에서의 첫 주였다.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할 내 진정한 고참들을 첫 대면한 것이다. 방위라더니 왜 이렇게 하나같이 덩치들이 다 좋다. 이 정도면 현역 대상자 아닌가? 내 아버지들은 극과 극이다. 너무 체격이 좋아서 할 말이 없는 고참들이 많은데 그 와중에 윤 일병님은 너무 귀엽다. 아버지 군번이라지만 고참은 쉽지 않다.
아침마다 부대 출근하기가 참 싫다. 아니 사실은 싫은지 좋은지 모르겠다. 새벽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꿈꾸는 거 같아. 내 의지로 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 나를 조종하는 거 같아. 어디론가로 달려가는 시내버스랑 자동차를 보면 금방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절대 그럴 수가 없어. 오로지 수송버스만 탈 수가 있다고. 수송버스가 부대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 버스가 위병소를 통과하는 순간, 다시는 저 위병소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수송버스에 내리자마자 중대 막사로 뛰어가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막사 앞에서 열린 문을 향해 경례를 하며 큰 소리로 "충용"을 외치고 들어서는 순간은 정말로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고참들뿐이니까 팔이 부러지도록 경례를 해야 하고 그 와중에 재빨리 환복을 하고 중대 막사 옆에서 부동자세로 대기!! 그래도 자대 배치받자마자 큰 훈련 뛰었다고 선임들이 고생했다고 한 마디씩 해준다. 조만간 들어올 후임 5월 기수와는 완전히 다르단다. 그러나 뭔 의미가 있겠어? 발톱은 다 빠져가고 있는데... 지난 주말 엄지발톱을 시작으로 하루에 하나씩?
오늘도 연병장의 돌을 주웠다. 주울 돌도 없는데, 왜? 그래도 두 손으로 했다. 하는 척했다?!!
판초를 세탁하라고 해서, 김 일병을 쫓아다니며 시다를 했다.
텐트를 세탁하라고 해서, 김 일병을 쫓아다니며 시다를 했다.
오늘도 나의 구세주, 유 상병님에게 구원을 많이 받았다. 바쁜 와중에 나를 PX에 데려가 주었다. 퇴근하면 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도 부대 내에서 먹으니 완전히 다른 맛이다. 근데 유 상병님, 한 달 후에 제대하는데 어쩌지?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자. 가능하기는 한가? 오늘만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버티자. 솔직히 나 자신의 위치를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군인인 거야? 민간인은 아니잖아. 이도 저도 아닌 방위인 거야? 그래서 군인이 아닌 거야? 그런데 총은 왜 주는 거야? 우리나라는 민간인 총기 소지 금지 국가인데... 아 맞다. 공식적으로 단기사병..이라고 부르더라.. ㅎㅎ
새벽이 오고 출근하고 훈련받고 갈굼도 받고 퇴근하고 밤이 오고, 다시 아침~~
그런데 겨우 일주일이 지난 거구나. 에효... 너무 정신이 없어서 되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드네. 급 슬퍼졌어. 지난 한 주가 짧고도 길게 지났구나. 남은 17개월도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내일은 일요일이잖아. 야호!! 온전히 하루 종일 누워 있을 테야. 날 그냥 내버려둬. 밥 따위는 안 먹어도 돼. 짜장면?? 아 그런데 벌써 월요일이 자꾸 생각나.. 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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