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1일 수요일 맑음 2150
당연하겠지만 오늘도 미치도록 더웠다.
으헉 1500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설마 진짜 시킬 줄은 몰랐는데... 지난달 72사단 사망 사건 이후 한동안 지켜지던 혹서기 지침은 잊히고 있다. 물론 이 정도의 작업은 일도 아니지만...
올해는 유격이 없단다. 이유는 국군의 날 행사 참여 요원으로 선정되어, 카드섹션 연습을 해야 한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앞으로 두 달여간 큰 훈련이 없다는 의미가 되겠다. 다행이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몸빵 하는 훈련보다는 낫겠지. 아닐 수도 있으려나? 정말 훈련이 아예 없을 리가 없고, 오히려 짬짬이 더 빡빡해질 수도 있겠다.
지난해는 팀스피리트에 참가했다고 하고, 그전 해인가는 국군의 날 시가행진에도 참여했다더니, 올해는 카드섹션이다. 방위는 여러모로 잡스럽게 쓸모가 많은 것 같다.
군대에서 예측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총을 쏘라고? 넵 알겠습니다.
카드섹션? 넵 알겠습니다.
행군? 넵 알겠습니다.
죽어? 넵 알겠습니다?
1990년 8월 2일 목요일 맑음 2130
지각했다.
지각은 곧 탈영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탈영이 아닌 걸로...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주는 여름휴가 주간이다. 하기는 여름의 더위도 잊고 있던 이등병 주제이니... 부대가 위치한 경춘가도는 동해로 향하는 휴가 차량으로 인해 출근길이 꽉 막혔다. 덕분에 평소라면 부대에 0700이면 도착했을 수송버스가 0900에 도착했다.
이래서 반드시 수송버스를 타야 한다고... 수송버스에 탑승하는 순간 출근 인증이고 주변에는 고참들도 있으니 늦어도 할 말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도 이등병의 마음은 한없이 부담스럽기는 했다. 사실은 버스에 갇혀 있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리 고참이라도 출근길 버스에서 자리를 차지한 후임에게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길어진 출근길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서있는 사람들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버텼다. 정신없이 졸았다.
구리 시내를 지나는데 평소에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던 인원들이 지나가던 수송버스를 보더니 달려들었다. 원래는 구리 시내에서 태우는 일은 없지만 상황이 급박해지다보니 그야말로 똥줄탄 인원들이 수송버스에 매달린 것이다. 하기는 수송버스가 아니라면 이건 뭐 답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수송버스 기사 아저씨도 횡재하는 거지 뭐. 평소보다 2시간은 더 걸린 출근길이다.
그나마 내가 탄 버스는 출근 버스 중에 가장 먼저 출발하는 차량이었기에, 지각이었음에도 중대에 거의 일착으로 도착했다. 결국 점심시간이 다되어서 도착한 중대원도 었었고, 오전 내내 출근 인원들 기다리느라 대기만 탔다. 먼저 출근한 인원들끼리 청소하며 물자정리하며 오손도손 시간을 보냈다. 돌발 상황이 분위기를 좀 너그럽게 만든 것 같다. 북한은 남쪽의 휴가 시기를 잘 이용한다면...
힘을 내자. 여름을 잘 버티자.
1990년 8월 3일 금요일 맑음 2304
또 한 주가 지나가고 있다.
오늘 휴가 나온 현역이 있다. 입대 후 첫 휴가! 고생했다. 잘 쉬어라.
벌써 4개월이 지난 건지, 이제 겨우 4개월인 건지... 하여간 나왔으니 다 잊고 잘 쉬어라.
어제만 피크였는지 오늘의 출근길은 정상이었다. 하루 정도 더 막혀도 되는데...
바다가에서 잘 놀다 오세요. 서울은 우리가 지킬 테니...
1990년 8월 5일 일요일 맑음 2145
더운 여름 날씨가 매일 이어지고 있다. 너무나 더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루를 지냈다.
나보다 일주일 먼저 현역 입대했던 윤철의 휴가!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지난 2년여간 학교 다닐 때는 늘 함께 지내다시피 했다. 같은 동네이기도 해서 등교도 같이하면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몇 개월 만에 본다.
자기보다 더 새카맣게 타고 야윈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전투방위가 빡세기는 하다..라고 감탄 아닌 감탄을 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더 큰 부러움으로 끝났다. 전투방위가 훈련이 많아서 참 힘든 것도 맞는데, 아무리 사단 본부 전산병이라도 현역들의 내무생활이라는 것이 정말 싫은 사람 하고도 24시간 한 공간에서 같이 잠자고 숨 쉬고 밥 먹고... 어디 피할 곳도 없다는 점이 사람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게다가 1년 더 긴 복무기간! 그것만으로 윤철아, 네가 이겼다.
어느새 4개월! 남은 것은 겨우 14개월! 머지않아 일병 달고, 휴가 가고, 상병 달고, 제대하면 된다. 윤철은 그런 나를 몹시 부러워했다. 그래, 1년의 차이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무게감이지. 단 하루라도 편안하게 숨쉬기 힘든 게 군생활인데... 현재 30개월인 복무기간이 하다못해 24개월로라도 줄어드는 시기가 올까? 그나마 대학 1, 2학년때의 일주일간의 문무대 훈련으로 현역 3개월 단축 혜택을 받았던 기회도 이젠 더 이상 없는데...
우리 모두 이 악물고 참고 견디자.
1990년 8월 6일 월요일 월요일 맑음 2150
예고도 없이 경훈이 휴가를 나왔다고 한다. 언제 만나더라도 마음 편한 오래된 친구! 여름은 여름인 건가?
1년 먼저 현역 입대! 그가 첫 휴가를 나온 날, 때 상계동 집까지 찾아가서 만났을 때, 고교 시절 늘 젓가락 같이 말라있던 녀석의 거대해진 등짝을 보고 놀랐다. 방에 들어갔을 때, 웃통을 벗어 젖히고 군복을 다리고 있었는데, 역삼각형의 등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변한 녀석을 보며 감탄했다. 너도 몸이 커지는구나.. 라며 모두들 한 마디씩! 말뚝 박으라고, 체질이라고... 힘을 많이 쓰는 포병이라서 그런지 떡대가 장난이 아니게 변했다. 단기 하사 지원 예정이란다. 원래 눈치 빠르고 싹싹하고 그런 녀석이니까, 인정받고 있다는 말이겠지. 말하자면 에이스인 것이다.
아마도 내년 가을에는 같이 놀러 갈 수 있겠지.
1990년 8월 7일 화요일 맑음 2039
적잖이 더운 날씨!
아침부터 심상치 않더니 한 낮 기온이 다시 35℃를 찍었다고 한다.
훈련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찜통 내무반에 머물기도 힘든 날씨! 소대 별로 여기저기 흩어져 교육 실시!!
교육 훈련을 빙자한 휴식과 같은 하루였다.
1990년 8월 9일 목요일 맑음 저녁 늦게 비
저녁 늦게 비가 내리면서 조금 선선해졌다.
어제가 입추라더니 가을이 오는가 보다. 성급한 기대겠지. 벌써 가을 타령이라니.. 현실은 아직 한창 여름이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다.
다음 주부터 아버지들이 말년 휴가를 간다고 한다. 아, 너무 부럽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귀엽고 친절한 윤 상병님은 동해안으로 갈꺼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지난여름에는 대학 동기들과 동해안 해수욕장을 찾아다니면서 보냈었는데, 올해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지난여름 그 바닷가에서 이번 여름 이렇게 꼼짝없이 군복을 입고 있어야만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바다는커녕 수영장도 못 가겠다.
고참들이 물어보면 난 몇 개월 남았는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머릿속 깊숙이 그날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걸 의식하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지. 그래도 오늘로써 또 4개월을 채웠다는 사실에 조금은 좋아한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시간은 참 빠르다. 그러나 여전히 아득하다.
어쨌든 아버지들이 말년 휴가를 떠난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설레기도 한다. 내년 이 맘 때는 나도.. 흑흑
1990년 8월 10일 금요일 흐림 2143
대대장님의 이취임식이 있었다. 새로 오신 대대장님과 앞으로 남은 군생활을 함께 하게 되겠지.
강 일병이 6기들을 대상으로 금전 갈취가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도난 사고까지... 완전 중대가 뒤숭숭해졌다. 카드섹션 연습이 시작되면서 중대가 텅 비는 시간이 생겼는데 그 사이에 사건이 일어난 것 같다. 무언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불확실한 상황이다. 이등병들을 대상으로 소원수리가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피해가 없었다. 동기들도 피해를 당한 경우는 없었다. 영악하게도 머리수가 적은 기수들을 대상으로 장난질을 친 것 같다. 4기와 3기는 거의 40명에 육박하다 보니 잘못 손 데면 되게 시끄러울 것 같았나 보다.
강 일병이 어떻게 입대를 할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하다. 확실히 무언가 모자른데... 그의 동기들은 강 일병을 매우 강력하게 보살핀다. 마치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누가 봐도 모자라 보이는 그를 후임들이 무시하지 못하도록 늘 그의 동기들이 눈을 부라린다. 중대 분위기로는 8기가 문제라고 인식되는 것 같다. 중대 고참들도 8기들을 늘 주시하고 있고, 특히 7기가 8기를 아주 심하게 갈구는 분위기다. 보통 한 달 차이면 친구처럼 지내는데... 워낙 사고를 치는 기수라고 해서 모두 주시하는 것 같다.
강 일병 부모님은 의사라고 들은 것 같다. 강 일병은 군복무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강 일병의 부모가 아들 교육의 목적으로 강제 입대시켰다고 한다. 괴로운 일은 그 피해를 중대에서, 특히 그의 아래 기수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강 일병으로 인해서 종종 어이없고 힘든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꼴에 고참이라고 또 이등병들에게 지적질을 한다. 너만 잘하면 될 텐데...
강 일병 부모가 피해를 보상하기로 한 모양이다. 사건 종결을 위해 매우 빠르게 움직인 것 같다. 그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마무리될 거 같다. 그래, 여기는 군대잖아.
내일 주말이다. 퇴근하자.
1990년 8월 12일 일요일 맑음 2027
휴가 나왔던 경훈이 복귀했다. 상병 에이스도 휴가 복귀는 싫은 모양이다.
잃어버렸던 출입증을 찾았다. 책상 서랍 구석에.. 누가 거기다 가져다 놓은 거야. 잘 되었다. 새로 받은 출입증이랑 잘 뒀다가 잃어버리면 그때 쓰면 되지.
1990년 8월 13일 월요일 맑음 2212
올여름의 마지막 더위일까?
아버지들이 휴가를 떠나 버리고 중대가 썰렁해진 것 같다. 이제 중대 선임은 5기다. 그만큼 나도 고참으로 향해가고 있다는 말이겠지. 뭐 그래봤자 아직은 이등병 4개월 차일뿐이다.
인원이 많았던 나의 아버지 4기들의 제대가 가까워짐에 따라 중대 개편이 있을 예정이란다. 그동안 윤 상병님과 참 좋았는데... 나는 윤 상병님이 참 좋다. 작은 덩치에 귀엽기도 하지만 사람이 좋다. 내가 버벅거릴 때마다 늘 많은 도움을 줬다. 아들이라고 특별하게 배려해 준 것 같다. 그랬던 그 윤 상병과도 이제 한 달 남짓 남았다. 아쉬울 것 같다.
카드 섹션은 학교 수업 같다. 지도 강사가 시키는 데로 맞춰서 제대로 된 번호의 카드를 펼치면 되는 단순한 일이다. 다만 이 뜨거운 더위에 연병장 뙤약볕 아래에서 버티는 게 고역이다. 정말 한여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까매 까매~~
1990년 8월 14일 화요일 오전 비 온 뒤 갬 2145
오늘은 내무반에서 하루 종일 정신 교육이 진행되었다.
말씀의 홍수! 공산주의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새삼 잘 알게 되었다. 아 불쌍한 북조선 인민 여러분! 통일이 되어 구해줘야 한다고 했다.
주중에 휴무일이 껴있으면 좀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별다른 훈련이 없이 실내 정신 교육으로 마무리되었다.
어쨌든 내일은 집에서 쉰다.
1990년 8월 21일 화요일 새벽부터 하루 종일 비 2054
정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정말 가을이 그리 멀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훈련의 계절이 다시 돌아온다는 점이다. 두 번째 200킬로 행군이다. 서서히 훈련 계획이 나오고 있다. 매일매일 거리를 늘려가며 행군을 하게 될 것이다. 아찔하다.
헌혈차가 왔다. 선택의 여지없이 헌혈을 해야만 했다. 강요는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묵시적으로 헌혈을 하는 분위기였다. 군복만 입으면 할머니도 여자로 보인다고 하는데, 간호사들을 보고 중대원들이 흥분했다. 퇴근하면 볼 수 있는 민간인인데, 왜 군복만 입고 있으면 이렇게 되는 건지...
헌혈을 하고 밀키스 한 병과 마가레트 한 박스를 받았다. 헌혈했다고 낮잠을 자고, 내무반에서 VTR로 영화를 시청하다가 퇴근했다.
1900년 8월 22일 수요일 흐림 비 조금
전투체육의 날!
족구, 소대 대항전! 그래봐야 4개 소대! 결승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
태권도! 조만간 승단 심사가 있을 예정이다.
퇴근을 해서는 3기들과 저녁을 먹었다. 맞고참이지만 친구 같은 분위기! 대개는 또래이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후배도 있다. 사는 동네도 비슷비슷하다 보니 이렇게 퇴근하면 같이 무언가를 하며 놀게 된다.
중대 내에서는 3기들의 머리수가 워낙 많다 보니 늘 시끌시끌하고 눈총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 4기도 작은 숫자는 아니지만 워낙 3기가 많다 보니 문제가 터지면 3기들에게 먼저 화살이 간다. 현재는 3기들이 이등병들의 바람막이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 와중에 3기 중의 육방인 김진문 이병은 다음 달이면 소집해제다. 아 부럽다. 육방은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동기 중에도 육방이 한 명 있다. 그 친구가 나가는 날은 정말 배 아파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건장 탄탄한 녀석이 조상덕을 본다. 우리 조상님은 뭘 하셨어요?
1990년 8월 23일 목요일 맑음 2043
사실상 여름은 끝났다.
그 신호탄은 유격장 보수 작업이었다. 유격장 기초장애물코스 중에 그네넘기에 대한 보수작업이었다. 특히 그 물웅덩이말이지. 물론 지금은 시즌이 아니니까 아직 고인 물은 없지만... 이런 젠장! 내 무덤 내가 파고 있는 거라고... 유격은 하지도 않을 거라면서 왜? 결국 하려고 하는 건가? 불안한데...
이번 달 신병 중에 고교 동기가 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전입온 신병들이 대기 중인데 그 친구를 알아보았다. 부대 내에서는 아는 체를 할 짬은 못되고 퇴근 버스에서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걱정을 많이 하더라. 나도 그랬으니까... 같은 이등병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힘든 거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같은 동네에서 모이는 곳이다 보니까 학교 동기라든가, 선후배가 좀 있다. 어차피 당분간 함께 박박 기어야 할 이등병! 같이 열심히 잘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석 달 먼저라고 고참이라면 고참이지만 지금은 각자 알아서 화이팅!
당분간 그렇게 유격장 보수 작업은 짬짬이 이어질 것 같다. 어차피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하는 일인지라 카드섹션이랑 별 차이도 없을는지도.. 그래도 뙤약볕 아래 앉아 있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는 게 낫겠지.
4개월여 군생활로 나도 이렇게 변하는가 보다. 노가다가 더 낫다니...
1990년 8월 24일 금요일 맑음 2126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아래서 또 다른 인내력을 시험당했다. 하는 데까지 해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삽질이라도 좀 배워두고 입대할 걸 그랬다. 하기는 입대 전에 배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이 뭐 한 두 개인가?
어쩌다 보니 3기와 4기가 함께 모여 작업을 했다. 현재 중대 내에서 가장 머릿수가 많은 기수들이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 봤다. 오겠지만 올 것 같지 않은 내년 이 맘쯤,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다행히도 올해는 유격은 없을 거라고 한다. 비록 유격장 보수 작업은 진행하지만 유격은 없단다. 야호~~ 원래 데로라면 유격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야 할 시기지만 올해는 국군의 날 행사요원으로 참석하게 되어서 유격은 없단다. 이거 누구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야? 국방부? 대통령??
그리고 다음 주에는 중대 개편이 있다. 나는 2소대 화기분대 M60 주특기로 배치받게 되었다. 이런 젠장할... 망했다.
1990년 8월 25일 토요일 맑음 2340
공병대 이등병인 동혁이 외출 나왔다. 서울 모처에서 공사 중이다.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꽤 힘든 모양이다. 마음이 참 아프다.
어머니께서 불고기도 준비해 주시고 이거 저거 음식을 해주셨다. 모처럼의 집밥이 맛있는지 잘 먹었다.
전공이 전공이어서인지 학과 동기 중에 공병대 입대자가 좀 있는 편인 듯...
1990년 8월 27일 월요일 맑음 2052
오늘부로 M60 부사수가 되었다. 어쩌냐고...
나의 아버지인 강 상병이 분대장이었지만 말년 휴가도 다녀왔으니 열외이다. 그러면 최 형욱 일병과 이 경일 일병인데 나의 고교 후배! 그리고 류 이병은 나보다도 더 체격이 좋으니... 나만 잘하면 될 것 같다.
교보재가 던져지고, 기억해야 할 사항이 늘어났다. M60의 문제는 그 10.432㎏ 총을 군장 위에 얹고 행군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비 총열 및 수입 도구도 별도로 챙겨야 한다. 게다가 조총 훈련까지... 부사수 이하, 탄약수들은 개인 화기도 챙겨야 하고... 하여간 짐이 2배로 늘어났다.
소대 개편 기념으로 맛보기 조총 훈련까지... 옆에서 보면 폼은 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완전 그저 고문일 뿐이다. 말 그대로 타이밍이 중요하다. 나도 화기 소대원들이 하는 조총 훈련을 본 적은 있어도 직접 해보기는 오늘이 처음인지라 많이 버벅거렸다. 처음이니까...
태권도 교육도 받아야 한다. 조만간 승단 심사가 있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잘 버텼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자.
1990년 8월 28일 화요일 맑음 2130
선선해지던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
오전 카드섹션
오후 태권도
1700 이 가까워지면 퇴근 준비를 한다. 오늘 같이 분위기 좋은 날이라면 중대 막사 옆 화장실 옆 공터에 모인다. 나무가 우거져 제법 그늘도 지고 공간도 넓어서 퇴근 점호하기에 딱이다. 훈시가 길어지면 모두가 초조해진다. 빨리빨리 환복하고 수송버스에 탑승해야 잠실까지 앉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팔도사나이를 크게 한 번 불러 제끼고, 중대 막사로 튀어 들어가 환복을 하고 나온다. 이등병 주제인 우리는 당연히 더더욱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환복 후 중대 전원이 정렬하고, 중대장에게 충용을 외치고 잽싸게 수송버스로 향한다. 세상 이렇게 발걸음이 빠른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때만큼 고참, 쫄병 할 것 없이 일심동체인 경우도 없을 듯...
자리차지하기 경쟁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와 1중대가 수송버스 대기 장소와 제일 근접해 있다. 그러다 보니 산중턱에서부터 내려와야 하는 3대대나 4대대에 비하면 신속한 탑승에 유리하다. 가끔은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면 일부러 설교를 길게 하면서 꼬장을 부려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라면 수송버스에 앉아가기는 포기다.
어쨌든 오늘도 퇴근은 칼 같이...
1990년 8월 29일 수요일 맑음 2105
전투체육의 날이다.
원래 전투체육의 날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편인데, 카드섹션 훈련을 받느라고 모두들 스트레스가 쌓여 있다 보니 분위기 전환용으로 족구를 하거나 축구를 하거나.. 중대원들은 흐흐 허허! 원래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나는 태권도 연습을 했다. 나름 유연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리를 찢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산속에 숨어있는 3대대나 4대대 보다도 우리 대대의 훈련 분위기는 나쁘지는 않다. 보는 눈이 많다 보니...
1990년 8월 30일 목요일 맑음 2136
퇴근 버스를 놓쳤다.
방위에게 평소 퇴근을 놓치는 일은 경계에 실패한 경계병과 다름없는 큰 일이지만 수송부 작업 지원을 나갔다가 늦어졌다. 결국 부대 내에서 애국가를 듣고 퇴근했다. 신교대 애들이 석식을 위해 사단 식당에 집합해 있는 열을 가로질러 통과하여 정문으로 퇴근했다. 재네들도 내일모레 또 자대 배치 되겠군. 너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 없어. 고생 끝, 지옥 시작!! 환영한다.
잠실역까지 직행 버스를 탔다. 다시 집으로 오는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수송버스를 놓치면 이렇게 번거롭다.
말을 말자. 날도 더운데 짜증스럽다. 이런 날은 차라리 영내 대기를 시켜주면 좋겠다. 그러나 늘 하는 말이지만 부식이 문제다. 난 안 먹어도 되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굶는 것은 국방부 지침에 위배되는 일이란다. 이럴 때 보면 나는 확실히 방위 맞다. 도시락 싸가지고 다닐까?
1990년 8월 31일 금요일 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말 그대로 원수 같은 비였다. 오늘처럼 웬수 같은 비는 여태껏 없었다.
오전에는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유격장까지 전봇대 3개를 날랐다. 유격도 안 한다면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자꾸 성을 쌓고 있다. 유격의 성! 뭐 알 필요도 없지. 까라면 까고.. 산을 옮기라면 산을 옮겨야지. 비 맞으며 전봇대를 옮기다 보니 진짜로 산을 옮기는 기분이 들기는 했다.
오후에는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태권도! 심사가 얼마 남지 않다 보니... 무리했다. 군복 1벌, 양말 2켤레, 팬티 2장!! 의미도 없지만 갈아입으라고 해서 갈아입어가며... 빨랫감만 늘어났다.
월급날! 5000원 받았다. 담배는 내일 준단다. 난 안 줘도 되는데... 퇴근길에 롯데백화점에 들러 음반 한 장 샀다. 내 월급은 그렇게 날아갔다. 월급이라고는 하지만 명목은 교통비이다. 그런데 수송버스비만 따져도 한 달에 25000원인데, 확실히 적자다. 거기다가 집까지 타고 가는 시내버스 요금은 계산도 안 했다. 너무한 거 아님? 결국 나머지 국방비는 집에서 보조받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 집은 방위성금을 늘 내고 있다고나 할까?
8월이 끝났다. 나는 이제 8월을 한 번만 더 겪으면 제대한다. 너무 거대한 계획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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