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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1991년 9월

rivervox 2024. 9. 27. 00:00

1991년 9월 1일 일요일 맑음 2200

감사하게도 9월의 첫날은 일요일로 시작되었다.

 

내 군생활의 마지막 9월! 어쩐지 더욱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더 지루하고 힘들 것 같다. 마음만 홀로 먼저 가서 9.28을 찍고 있다. 서울 수복이 되었던 그날, 나는, 우리는 제대한다.

 

마무리를 잘하자!

 

1991년 9월 2일 월요일 맑음 2106

쓸쓸했다. 5시 30분! 새벽 출근길에는 가을이 어둠으로 남아 있었다. 

 

3기들이 전역했다. 대학생으로서 복무단축혜택을 받는 인원들이 전역했다. 축하면서도 무언가 마음이 너무 헛헛해졌다. 쪽수도 많았는데 한꺼번에 빠져나가니 중대가 확 쪼그라든 느낌이다. 한 기수 고참이지만 사실상 거의 친구처럼 지내왔다. 우리들의 18개월 중에 16개월을 함께 했다. 동기들을 제외하면 최장 기간인 셈이다.

 

함께 겪은 일이 참으로 많다. 두 기수 합이 거의 중대의 5분의 1 정도는 되다 보니, 늘 타깃이 되었고, 늘 중추적 세력이 되었다. 그랬던 그들도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렇게 제대를 했다.

 

기쁘기도 하면서 울컥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더 이상 수송버스에서 복작거릴 일 없겠구나. 어차피 새로운 애들이 또 늘어나겠지만 우리의 시간은 이제 끝이다. 부디 모두들 잘 살아랏!

 

다만 우리의 말년 분대장 경일은 남겨졌다. 혜택을 받지 못해서 아직 열흘 더해야 한다. 오늘 제대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망울이 어쩐지 촉촉한 듯...

 

울지 마! 우리 아직 함께 지낼 시간이 좀 더 남았음을 기뻐하자?!! 난 네가 너무 좋아~~

 

1991년 9월 17일 화요일 맑음 2044

미처 예상하지 못한 훈련의 날들!

 

지난주는 대대 ATT를 뛰었다. 정말로 나의 마지막 훈련이었다. 사실상 인해가 M60 사수 역할을 했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탄약수로써 뛰어다녔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내가 사수였지만 그건 욕심이다. M60 사수로서의 장점이 몇 안되지만 자리를 사수하는 역할을 함에 있어서 몸이 편한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인해가 이제 충분히 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일주일 앞서 나의 사수직을 넘겼다.

 

동기들의 제대를 쓰린 맘으로 쳐다봐야 했던 경일도 지난 목요일 제대했다. 토요일에 경일 제대를 축하하는 소대 회식을 했다. 보통은 당일날 하는 편인데 훈련 중이다 보니 미뤄졌다. 이제야 나를 형이라고 편하게 불렀다.

 

어제부터 전역병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훈련소에 헤어지고 보지 못했던 동기들을 모두 볼 수 있어 새삼스러웠다. 군복무 중 사회와 단절된 부분에 있어서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이라던가, 제대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매우 사무적인 교육이 진행되었다. 물론 사실상 사회와 단절된 적이 없는 방위에게는 필요 없는 부분도 있지만, 교육생 중에는 현역들도 있다 보니 필요한 내용이기도 했다.

 

입대할 때도 그렇게 불안했는데, 조만간 생길 변화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있다. 그냥 체질이 그런 모양이다.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열흘 남았다. 믿기지를 않는군.

 

1991년 9월 18일 수요일 맑음 2142

출근 안 했다. 집에 있어도 뭐 크게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새벽에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수송버스를 타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제 딱 열흘 후면 수송버스와도 안녕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나는 얼마나 행복한거지?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1991년 9월 21일 토요일 맑음 2349

아쉬움!

 

올 해는 추석이 일요일어서 아쉽다. 그게 아니고 좀 더 열심히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새삼스럽기도 하다. 이제 와서 그런 아쉬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시간은 항상 그랬지. 지나가기 전에는 숨 막히게 하면서 지난 후에는 아쉽고 유감스럽다. 지나간 시간에 대하여 필요 없는 그리움을 갖고 있을 이유는 없겠다. 그보다는 이제부터 새롭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제대한다고 당장 무엇이 크게 바뀌겠어? 세상은 여전히 자기 걸음대로 걸어갈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1991년 9월 22일 일요일 맑음 2250

1100 다 되어 기상했다. 모처럼 푹 잔 잠이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라이온즈가 8:3으로 승리했다.

간만에 우정의 무대 시청!! 이젠 남의 일?

 

내일 하루 더 쉬겠지만 지난 18개월 동안 해왔던 대로 군복을 다렸다. 마지막 다림질이다. 내 마지막 5일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다림질을 했다. 정말로 줄 잡은 자리마다 맨들 거리고 색은 바래져서 국방색이 아니라 녹색이 다 되었다.

 

얼마나 꿈꿔온 시간인지... 이제부터 남은 일주일간은 모든 것이 마지막이 되겠지.

 

1991년 9월 24일 화요일 맑음 2132

하루하루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참으로 어찌어찌 그 세월이, 그 암담했던 시절이 지나갔다.

 

요즘에는 내닫는 걸음걸음이 새롭다. 내가 지나다녔던 그 길이 정말 그 길이었을까? 지난 겨울 눈이 뎦여 있던 부대 주변의 논밭은 봄이 오면서 풀밭으로, 여름이 되어서는 진한 녹색빛으로, 이제 가을이 되어 황금빛이 일렁거린다.

 

왜냐구?

 

"추석도 지났잖아. 때가 된 거지."

 

우리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난 지금 하나의 끝맺음을 하게 된 것을 매우 시원스럽게 여기고 있다. 물론 안다. 인생의 고난이 어디 이것으로 어디 끝이 있겠는가? 오히려 새로운 출발과 속절없이 지난 내 젊은 날의 시간들을 아쉬워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쨌든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그날이 이젠 코 앞에 다가왔다. 사실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는다. 이미 앞서 나간 사람들의 유치한 말년의 짓거리들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막상 직접 닥치고 보니 어쩔 수 없다.

 

어쩐지 아쉽고, 섭섭하고... 이 군생활 자체에는 추호의 미련도 없다. 그토록 힘들게 지내오지 않았는가? 단지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 나만의 생각이려나?

 

아직도 사흘 남았다. 유감이 남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하자.

 

1991년 9월 26일 목요일 흐림 밤에는 비 2254

영화를 보고, 볼링도 치고... 갈참의 하루는 길기만 하구나.

 

이제는 정말 끝이다. 내일 다시 출근하면 18개월 전투방위 생활 딱 하루가 남는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구나 싶은 1주일이다.

 

"이 상병님, 기분이 어때요?"

 

애들이 묻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여전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좋기는 한데 그냥 무덤덤한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날의 흥분을 내가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시간이 오면...

 

1991년 9월 27일 금요일 비 2157

대대장님과 면담!

 

최근 일련의 사고들로 인해 되게 안쓰러워진 대대장님의 훈시! 성실할 것! 친할수록 금전거래를 하지 말 것!! 현실적인 조언을 들었다.

 

마지막 하루! 내일은 출근하면 중대장에게 신고하고 중대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부대를 나서게 될 것이다. 중식까지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녁에는 소대 회식이 예정되어 있기는 하다.

 

옛날의 일이 생각난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피곤함의 끝에 다다른 그 해 겨울의 그날! 마지막 교시의 마침종이 울린 순간의 느낌 "이젠 끝났구나"

 

마침 종소리를 기다려본다. 정말 끝날까?

 

소중했던 나의 화기분대원들 ('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