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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1990년 9월

rivervox 2024. 8. 15. 10:19

1990년 9월 1일 토요일 비 2122

태풍!!

비가 꽤 많이 내렸고, 바람이 불었고, 그렇게  점점 가을로 가을로...

 

출근해서 환복하고 워커 닦고 창고 막사 주변 청소하고 점호받고 중대 막사 청소하고 군가 연습하다가 대대장님 훈시 듣고 담배 한 보루 반을 받고 퇴근했다. 담배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소대원들에게 무상 나눔이었다. 

 

국군의 날 행사 참여하고, 행군 & 진지공사, 중대 및 대대 ATT, 연대 RCT... 어느 새인가 12월이 되어 있겠지. 그럼 절반! 스케줄 빵빵하네!!

 

1990년 9월 2일 일요일 흐리다가 해가 뜨기도 2020

일요일 오후가 되면 언제나 그렇다. 짜증스러워지고 마음은 무거워지고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마음의 평화를 구하며 군복에 줄을 잡아 본다. 일요일의 시간은 무심하게도 참 빨리 흐른다.

 

1990년 9월 3일 월요일 맑기도 흐리기도 2036

카드 섹션은 단순하지만 무한으로 반복되는 고문 같다.

 

날씨만 좀 선선하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도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다. 하루 종일 연병장에 서서 신호에 맞춰 카드를 들었다 놓았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과 정확성! 지휘자의 콜에 따라 정확한 카드를 정확한 시간에 들어야 한다. 꼭 두 장씩 한꺼번에 넘기면서 삑사리를 내는 인원이 있다. 특히 이등병이라면 고참들 갈굼이 줄줄~~

 

72사단 병력도 동원된다고 하니 9월 마지막 주에는 함께 모여서 현장 리허설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냥 열심히 하자!

 

1990년 9월 4일 화요일 맑음 2052

점점 밤이 길어지고 있다. 바라던 바이다.

 

요즘의 일과는 카드섹션이거나 태권도이거나 양자택일이다.

 

오늘은 따가운 태양아래서 태권도! 코 끝과 살갗이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왼쪽 골반이 몹시도 아프다. 그동안 과도한 다리 찢기였나? 어쨌든 승급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내일 알 수 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하기는 했으니까.. 그런데 열심히가 아니고 잘해야 되는 일이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여 누워서 다리를 계속 마사지하고 있다. 설마 내일 걷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다리가 어기적! 퇴근길에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무겁게 질질 끌다시피 했다.

 

재미있기로 하자! 열심이기로 하자! 오늘도 피곤한 하루를 보낸 나의 사랑하는 벗들이여!! 이 밤에 모두에게 충분한 평화와 휴식이 있기를... 난 너희들이 보고 싶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세상이 우리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1990년 9월 5일 수요일 맑음 2109

와, 합격이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승단을 위한 또다른 끝없는 여정의 시작이다. 젠장!

 

오전에는 정신교육이 진행되었다. 늘 똑같다. 우리의 주적은 누구? 간부! 는 아니고 북한이지. 오후에는 대대 체육 대회!  씨름! 전투닭싸움! 2인3각!!! 아기자기하기도 하지. 소박하다.

 

그래도 다행히 밤새도록 아프던 다리가 출근하니 괜찮은 것 같았다. 아픔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참들의 갈굼이라고나 할까? 아 방위 정신 어쩌냐고...

 

1990년 9월 6일 목요일 흐림 2110

시간이 빨리 흐른다. 그리고 시간은 빨리 흐르지 않는다.

 

오전에는 카드 섹션 연습이 있었다. 상반신 크기의 카드북을 들고서 버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34페이지던가... 하루 종일 하고나면 어깨가 아프다.  들고뛰어 다니는훈련에 비하면 몸은 편한 거겠지만, 좁은 자리에 내리쬐는 태양을 받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세상 뭐 하나 쉬운 일은 없다.

 

오후에는 보안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유격 그리고 태권도... 빡빡한 하루였다. 올해의 유격은 FM으로 진행되지 않지만 코스 하나 정도씩 짬짬이 진행된다고 한다. 올해 유격은 없다고 하더니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안 그러면 뭐 하러 유격장 보수 작업을 했겠어. 또 속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제대로 하던지... 누군가 유격 훈련했다고 보고할 실적이 필요한 모양이다.

 

지금 이런 짬짬이 유격은 일도 아니다. 정말 큰 일이 다가오고 있다. 행군이 다가오고 있다. 물론 같이 맞물려 있는 진지공사도 큰 일이지만 어쨌든 악센트는 행군에 있다. 중대 내에서는 우려와 걱정과 함께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카드 섹션 연습으로 인해서 예비 행군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 보니 실전에서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걱정인 것이다.

 

화기분대원으로써는 처음이다. 소총에 군장만으로도 이미 충분할텐데 거기에 M60 10.432㎏ 까지... 분대원들끼리 돌아가며 짊어지고 가겠지만 보통 일이 아니다. 어차피 낙오는 선택지에 없다. 자대배치받자마자 따라갔던 지난 5월의 첫 행군도 낙오는 하지 않았으니까 감히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아는 게 병이라고, 행군의 고통을 경험하고 보니 마음속 한 구석에 커다란 짐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발톱은 다 빠졌으니까 더 빠질 것도 없다. 미리 생각하지 말자. 닥치면 또 하는 거지.

 

1990년 9월 7일 금요일 맑음 2100

오늘 갑자기 더워졌다.

 

오전의 카드 섹션 교육 동안 따가운 태양을 바라보며 연병장에 서 있었다. 다 익는다는 말이다.

 

오후에는 조총 훈련! 그리고 또 태권도!! 카드 섹션이 워낙 시간을 많이 잡아먹다 보니 생각보다 M60 주특기 훈련은 자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꾸 들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분 탓이겠지. 마음의 준비를 그렇게 하고 있는 거지. 마음을 텅.. 비우라고..

 

퇴근 점호 때 문필주에게 몇 대 맞았다. 교육시간에 고참들 욕먹는데 떠들었다고... 내가 정말 그랬는지 기억도 없다만 왜 퇴근을 앞두고 때리냐고... 기분 나쁘게... 군대 좆같다는 소리만 속으로 되뇔 밖에...

 

때릴 때는 제발 티 안 나게 좀... 눈치 빠른 어머니가 물어보시면 뭐라 말하기도 어렵다.

 

1990년 9월 9일 일요일 비 2130

동생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풍족한 길이 아니어서 고생할 텐데... 그녀의 용기에 응원을 보내 잘 버티기를 바란다.

 

1990년 9월 10일 월요일 비 2148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는 하루 종일 비를 맞았다.

 

3기 육방, 김진문이 내일 나간다. 한 잔의 술을 나눈다. Congratulation!! 부러운 듯 안 부러운 듯... 괜히 마음이 무거운 듯 안 무거운 듯...

 

1990년 9월 13일 목요일 맑음 2121

믿을 수가 없네. 간 밤의 빗줄기를 생각하면 오늘 이렇게 해가 떴음을 믿을 수가 없다.

 

지난주부터 자주 내리던 비는 결국 이번 주 들어 대참사가 되었다. 한강 대홍수란다. 1920년 이후 최대 물난리란다. 수도권 전역이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 다 무너져 내리고 떠내려가고.. 불보다는 물이 무서운 것 같다.

 

어제는 퇴근을 못하고 영내 대기를 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영내 대기였다. 잠실역 일대도 물에 잠겼다고 했다. 모두들 각자의 집들을 걱정하였지만 비상연락망을 통해 어머니에게 퇴근을 못한다고 전파하고는 영내 대기하였다. 아무리 전투방위의 퇴근이 선택 사항이라지만 이런 일은 없었는데... 보름이고 한 달이고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당연히 예정된 일정에 따른 훈련 때문이다. 어제처럼 갑자기 퇴근을 못하고 영내 대기하는 일은 드물다. 전쟁이라도 일어났다면 모를까? 하기는 물과의 전쟁인가?

 

영내 대기하다가 왕숙천이 넘친다고 해서 대민지원을 나갔다. 강가에서 밤새도록 제방을 쌓았다. 어차피 어두워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었지만 눈앞을 가릴 정도로 비가 내렸다. 밤새도록 온몸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어마어마했다. 천둥 번개에 빗소리와 강물소리마저 무시무시해서 쓸려 내려가는 거는 아닐까 겁이 났다. 어둠과 폭우의 콤보라니, 무슨 사고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따지고 생각할 것도 없이 명령에 따라 미친 듯이 마대에 모래를 채워 둑을 쌓았다. 지치도록 둑을 쌓고 쌓고... 0400 쯤 부대에 복귀하였다. 더 이상 갈아입을 옷도 없고 갈아입는 것이 의미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것보다도 모두가 너무 지쳐 있었다.

 

샤워를 하고, 태권도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영내 대기! 중대원들은 불편하게 내무반에서 쪼그려 잠들었다. 출퇴근을 하는 방위 특성상 중대 막사는 잠을 잘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현역 내무반과 같은 침상은 없고, 교회 예배 볼 때 사용하는 것 같은 긴 의자들만 줄지어져 놓여 있다. 

 

중대원들은 너무나 피곤하다 보니 서로 끼여서 대충 자리 잡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피곤함이 넘쳤는지 그냥 잤다. 기절할 정도로 피곤했으니까... 아침 식사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강제적으로  식사를 마쳤다. 오후에는 또 정비를 해야 했다. 간 밤에 비에 젖은 옷가지며 장비들 손질이 필요했다. 모두가 비몽사몽간에 정신없이 흐느적거렸다. 선임들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럴 여력들이 없었으니까... 결국 이틀 만에 환복 하라는 소리를 들으니 참 반가웠다.

 

퇴근을 하고 보니 잠실역 인근이 난리다. 성내동까지도 물에 잠겼다가 좀 빠지는 상황이었다. 길이 너무나도 막혔다.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밤새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너무나도 피곤하다.

 

1990년 9월 14일 금요일 흐림 2000

한 잔의 술에 취했다. 몽롱하다.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힘든 일주일이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비야 그만 와!!

 

오늘도 대민 지원! 덕소쪽으로 출동했다.

비바람에 쓰러진 논의 벼 세우기 작전이다. 쓰러진 벼를 빨리 세우지 않으면 썩는단다. 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는데, 아 그 물컹한 느낌이란... 거머리가 있다고 조심해야 한단다. 중대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작업을 진행했다.

 

농부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벼세우기 실시! 사실 논은 보고 지나가기만 했지 직접 발을 디뎌 본 것은 처음이다. 완전히 서울 촌놈이다. 역시 군대를 오니 별별 경험을 다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퇴근이 있다. 특히나 이번 주는 갑작스러운 영내 대기로 퇴근을 못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퇴근 시간 엄수에 예민해져 있다. 우리야 당사자니까 당연하겠지만 간부들도 제시간에 퇴근 못 시킬까 봐 노심초사! 어떨 때는 방위가 퇴근이 어디 있어라는 것처럼 굴다가 다른 때는 퇴근 못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굴기도 한다.

 

정상 퇴근했다. 방위 퇴근이 이렇게 조마조마할 일이냐고...

니록 내가 지원 나갔던 지역은 아니지만! (출처:유튜브 다큐멘터리M)

1990년 9월 17일 월요일 흐림 2141

다시 또 태풍이 다가온다고?!!

 

일주일 만에 카드 섹션 훈련이 재개되었다.

 

지난주는 대홍수로 난리가 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드 섹션 강사가 큰 일 났다고 한다. 훈련은 얼마 못했는데 시간이 부족하단다.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은 내 몫이 아니다.

 

1990년 9월 20일 목요일 맑음 2150

집중적인 카드 섹션 훈련!

 

이제 행사날까지 열흘 남았다. 대통령도 참석하고 내외 귀빈도 참석하는 행사니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뭐 낙하산을 타고 강하 훈련을 하거나, 특공 무술 시범을 보이거나 더 힘들게 준비하는 부대도 많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제부터는 정말 집중적인 카드 섹션 훈련이 되겠다.

 

여전히 엉뚱한 카드를 펼치는 인간들이 있다. 정신을 안 차려서 그렇다고 하는데, 애당초 시스템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잘못 아닌 건가?

 

1990년 9월 22일 토요일 맑음 2301

시간이 없다 보니 주말 오전 시간마저도 카드 섹션에 할당되었다. 아마 다음 주에는 현장에 나가서 리허설을 하게 될 것 같다.

 

1990년 9월 26일 수요일 맑음 2207

카드 섹션 연습은 의외로 매우 피곤하다.

 

머리가 어딘가에 닿기만 하면 쉽게 잠을 잘 수가 있다. 이게 이렇게 피곤할 일이냐 싶은데 이렇게 피곤하다. 정말이지 얄짤없이 뙤약볕 아래서 버팅기고 있다. 그래도 행군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며 버티고 있다. 그런데 피곤하기는 하다. 이제 며칠 안 남았다. 몸도 쓰지만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잘못된 카드를 펼치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쓰다 보니 더 피곤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정도 머리 좀 쓴다고 이렇게 피곤할 일인가? 말 그대로 뇌구조가 이제는 국방부형으로 변해버린 모양이다.

 

이번 주말은 쉬지 못할 것 같다. 행사장에 가서 현장 리허설이란다.

 

9월 29일! 아버지들이 제대한다. 축하드려요. 원래는 10월 3일이 제대일이지만 추석 연휴이다 보니 당겨졌다. 다른 기수 선임들의 제대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아버지 기수들이 제대를 한다고 하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불과 1년의 차이지만 그 1년 사이에 부대 분위기는 또 많이 변했다.

 

카드 섹션 때문에너무 바빠서 시간을 제대로 빼지 못했다. 카드 섹션은 숨 쉴 틈 없이 꼼작 않고 자리를 지켜야 하다 보니 아버지의 제대를 제대로 축하할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마음으로는 정말 크게 축하드리고 부러워한다. 내 지난 몇 개월간의 중대 생활에 큰 기둥이 되어 주었다. 잘 가요~~

 

1990년 9월 30일 일요일 맑음 2001

하루 종일 여의도에서 카드 섹션 리허설 했음

 

대통령이 앉게 될 단상의 맞은편에, 대통령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가 카드 섹션 자리이다. 화장실도 못 간다고 한다. 되도록이면 물도 마시지 말고 대비를 해야 한다. 급똥이면 어쩌지?

 

낙하 훈련 중이던 공수부대원 한 명이 낙하산이 안 펴져 그대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그것도 여성 공수부대원이란다. 시신을 쓰레기 수거하듯 담아 갔다는 말이 있다.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사실인지도 알 길이 없다. 혹시 사실이라면 명복을 빈다.

 

드뎌 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