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one/army

금곡방위 (전투방위)

rivervox 2024. 2. 1. 03:24

 

20세기의 73사단은 충용부대였으며, 전투방위 혹은 금곡방위 라고 했다.

 

부대명은 충용! 경례구호도 충용!! 서울 강남, 송파, 강동, 성동구 등에 거주하던 징집대상인원들이 방위병으로 소집되던 부대였다. 병력들은 대재 혹은 대졸이 많았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3분의 2 정도가 학생이었다. 요즘 가끔 TV에 나오는 유명 변호사나 의사를 보면 당시 부대의 선후배였던 분들도 있다.

 
나는 73사단 205연대 소속이었다. 73사단에는 203연대와 206연대도 있었지만 사단 인원의 대다수는 205연대 소속이었다. 205연대 하에는 4개의 대대 그리고 각각의 대대는 화기중대를 포함하여 4개의 중대!! 중대 하에는 당연히 소대 그리고 분대로 구성되어 보병 사단으로써의 완전한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사단장은 준장급이어서 73사단에서의 성과를 기반으로 진급하기 좋은 자리라고 했다. 물론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병사들의 많은 노고가 필요했다.

 

중대 인원은 100명 정도였고, 현역병의 수는 매우 적었다.

 

 

10퍼센트도 안되는 인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역병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방위 신병이 자대에 오면 현역에게, 심지어는 병장이라도 말을 놓으라고 교육받았다. 워낙 머릿수가 밀리다 보니 현역들도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같은 중대였지만 타 부대 아저씨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방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부대라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중대 내 몇 안 되는 현역과는 일과 중 교류가 별로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자대 배치받은 현역과 가까이 지내기는 했다. 또래였고 어차피 현역 입대한 학교나 동네 친구들이 많았기에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친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편지를 부쳐준다거나, 물품을 반입하여 주기도 하였다. 원칙으로야 금지된 일이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했다.

 

현역은 소수이지만 그들만의 내무반 생활은 역시 녹녹치 않았다. 훈련량이나 강도만 생각해 보면 방위가 더 고된 부대였지만, 군 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이 싫든 좋든 고참들과 24시간 내무반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는 점이었음을 인정한다면, 내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개인적으로는 현역들을 많이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했다. 물론 서로 간 어느 정도 짬이 찬 다음에야 좀 편하게 말 한디라도 나눌 수가 있었다.

 

방위 생활의 꽃은 퇴근이었다.

 

 

많은 훈련은 힘들었지만 퇴근을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곡(전투) 방위 복무 기간 18개월 동안, 그 절반인 9개월 정도는 퇴근하지 못했다. 보통의 방위라면 매일 퇴근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73사단 방위는 퇴근이 보장되지 않았다. 훈련 계획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밤을 지새우며 퇴근을 못하는 일은 종종 벌어졌으며, 일주일 혹은 몇 주를 퇴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거의 매달 있었다. 또한 돌발적인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퇴근을 하지 못하는 상황도 더러 있었다.

 

73사단은 예비 사단으로써 기본적으로 훈련이 많았다. 부대의 위치는 서울 인근이었지만 강원도 군단하에 편제되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다면 철원까지 행군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그러기에 봄, 가을로 장거리 행군이 실시되었다. 천리행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천리까지 되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짧지 않은 행군 거리였다. 서울 인근에서 철원까지 1박2일에 걸쳐서 100킬로를 걸어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복귀 100킬로! 결국 200킬로의 행군을 짧은 시간 내에 진행해야 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행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행군이 그리 녹녹치 않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첫 200킬로 행군!

 

 

흉흉한 소문은 자대 배치 전 신교대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73사단 신교대는 사단 내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철저한 통제로 인하여 사단 내 타 인원과의 교류는 불가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듯 4주간의 신교대 기간 동안 자대 배치 후의 훈련과 관련된 온갖 소문이 있었다.

 

봄, 가을 연 2회 진행되던 이 강원도 철원까지의 행군은 사단 내의 가장 큰 훈련이었다. 행군으로 이동을 해서 최소 보름은 산 속에서 먹고 자며 진지 공사를 하고 다시 행군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훈련이었다. 금/학/산/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득한 생각이 든다.

 

자대 배치 첫날과 훈련 출발 날이 겹치는 상황이었다. 아마 일부러 그렇게 맞췄는지도 모르겠다. 연대장이 이번 신병들은 행군에서 제외하고 연대 내에서 집체교육을 할 거라는 소문이 한 바퀴 돌고 나면 아니다, 연대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FM 데로 신병들도 모든 훈련에 참여 시키도록 하라고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자대 배치받은 날 고참들과 눈 마주칠 틈도 없이 그렇게 머나먼 행군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의 그 긴장감과 아찔함이 온몸에 느껴진다. 훈련소에서도 이를 대비한 행군 훈련이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경험도 없고 준비도 못 한 행군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한탄강 다리를 건너며 뛰어내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원도 전방 산골짜기의 봄은 한겨울과 다름없었지만 제대로 된 보온 장구도 준비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다.

 

미처 길들여지지 않은 군화를 신고 그 장거리를 행군하다 보니 물집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워커독이 올라 발뒤꿈치가 다 까지고 발이 퉁퉁 부어 도저히 군화를 신을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행군으로 도착한 산 중에서 오랜 기간의 진지 공사를 마치고 다시 행군으로 복귀하여 집에 도착하고 나서 보니 발톱 10개가 순차적으로 빠져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발톱은 아예 빠져버리면 안 아프지만 빠지기 직전이 더 아프다. 그렇게 너무 아파서 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그냥 핀셋으로 잡아 뽑았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기겁을 했지만 막상 그렇게 발톱을 빼고 나니 오히려 시원하고 아프지 않았다. 물론 발톱 밑의 부드러운 맨살이 드러난 느낌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통증은 사라졌다. 그 이후에는 혼자서 집에서 그냥 뽑았다. 양말 신다가 걸려서 뒤집어져 빠지기도 하고... 그래서 이쁘장하던 발톱이 다 빠지고 새로 난 발톱은 엉망진창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못생긴 발톱이 흔적으로 남아 깎을 때마다 그 시절이 생각난다.

 

난생처음 정말 오랜 기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부대 복귀를 하여 처음으로 퇴근 수송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던 날의 짜릿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신교대와 자대 배치 받자마자 떠난 훈련으로 인해 정말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시커먼 산도적 같은 얼굴이 되어버린 아들을 보며 깜짝 놀라던 어머니! 어쨌든 나는 퇴근을 한 것이었다. 거의 두 달 만이었지만...

그렇게 훈련을 마치고 나면 사나흘 정도의 정비기간이 부여되었다.

 

부대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각자 알아서 쉬는 것이다.  그 이유가 훈련 기간 동안 방위들이 먹어서 부족해진 부식을 메꾸기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제법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다. 
 
사나흘 간의 정비기간을 집에서 보내고 드디어 사실상 출퇴근을 하는 방위로써의 첫날! 나는 잠실에서 이른바 수송버스를 타고 부대로 출근을 했다. 수송버스는 수송협회에서 운영하는 민간 버스였다. 버스 요금은 편도 500원이었다. 토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으니까 주 6일 3000원씩의 비용이 들었다. 월급이 5000원+담배 한 보루 반이었는데...

 

어쨌든 그 버스를 타면 혹시 사고로 인해 늦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었으니까 무조건 그 버스를 타는 것이 최선이었다. 잠실과 천호동 등 각 지역별로 버스들이 운행되었다. 시간표에 따라 운행했기 때문에 혹시 늦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막차가 있는 천호동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수송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나마도 안되면 아예 부대 앞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불상사가 있었겠지만...

 

막차를 타는 것도 어느 정도 고참이 돼야 가능한 이야기였으며 신병이라면 당연히 첫 차를 타고 출근을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당시에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가 막 방송을 시작한 시절이어서 난 출근길에 라디오를 귀에 꽂고 그 방송을 들으며 출근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방송을 들었다기보다는 그저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버스를 타면 의자에 앉아서 잤다고 봐야 할 것이다. 스마트폰 따위는 없던 시절이니 호주머니에 넣어도 티 안 날 정도 크기의 라디오를 구해서 들었다. 나는 늘 일찍 줄 서서 버스를 기다렸기에 앉아서 가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늦게 오는 동기를 무릎에 앉히고는 같이 머리를 부딪히며 졸면서 출근했다.
 
참말이지 그 동기들이 아니었으면 그 험한 세월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동기들 중에 특히 힘들어했던 나였기에 동기들은 나에게 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누구보다도 귀한 이들로써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아직도 큰 도움을 받아가며...
 

훈련은 여전히 많았다.

 

 

봄 가을로 이어지는 진지 공사와 그에 따른 행군! 그리고 그 장거리 행군을 대비한 수시로의 행군! 수많은 사격훈련! 아직도 한 여름밤에 밤새 총질해댔던 야간 사격 훈련도 잊을 수가 없다. 사단 평가를 앞두고 한 달 내내 사격을 했다. 당연히 퇴근은 늦거나 못하거나... 그리고 ATT, RCT, 평가, 다시 진지 공사, 혹한기, 또 진지 공사, 유격, 전투수영 훈련!! 정말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방위가 뭐 이런 훈련을 하나 싶은 그런 훈련이 참으로 많고 강도도 셌다. 정말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불어 나는 군대에서 태권도 1단을 따기도 했다.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병력 자원으로 쓸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잉여 자원으로 편성된 방위병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하는 일종의 테스트 베드와 같은 역할을 금곡 방위 그리고 송추 방위(72사단)에서 담당했다. 나조차도 입대 전에는 방위라면 모두 동사무소 방위인 줄 알았다.

 

그렇게 험한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아예 가족들이 모두 지방 어딘가로 이사를 해서 후방 부대로 전출을 한 인원도 있었다. 오로지 전출을 위해서 이사까지 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참으로 그럴듯한 일이었다. 나조차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오죽하면 그 해 여름 72사단에서는 뙤약볕 아래 행군을 하던 방위병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갑자기 한 여름 온도 관리 지침이 하달되어 훈련을 덜하면서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훈련이 많았다.


방위병의 꽃은 퇴근이었기에, 물론 퇴근을 아예 못하거나 유보당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5시까지만 버티면 퇴근이었다. 그게 큰 행복이었다. 죽을 듯 힘들더라도 9시간의 일과만 버티면, 그야말로 거꾸로 매달아도 돈다는 국방부 시계를 믿고 버틸 수가 있었다.
 
퇴근을 할 때 하더라도 부대 내에서의 하루 일과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훈련과 작업으로 채워져 있었다. 비록 5시 퇴근을 하더라도 그전까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훈련은 수없이 많았다. 오히려 더 바빴다. 훈련을 나섰다가 퇴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나르다시피 하여 부대를 복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가 너무 극과 극의 삶이었다. 출근하면 완전히 군기가 바짝 들어있다가, 퇴근 버스를 타면 민간인이 되는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군복만 입으면 머리박아를 시키고, 깍지 끼고 엎드려를 시키며 갈구던 고참들이 사복을 갈아입고 퇴근 후에는 친절한 아저씨 혹은 형이 되는 것이다. 그런 부조화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발생했다.

 

참으로 감정의 곡선이 양쪽 끝으로 왔다 갔다 하던 날들이 아닐 수 없다. 어떨 때는 차라리 퇴근 안 하고 그냥 부대에 남아 있는 게 낫겠다 싶은 날도 있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가서 부모님 얼굴을 보면 되도록 괴로운 티를 안 내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날도 있었다. 가끔 피멍이 들어 있는 주먹이라도 보는 날이면 부모님은 큰 걱정을 하게 되고 나로서는 그냥 별일 아니다라며 감추려고 하다가 오히려 화를 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퇴근하여 동기들과 혹은 친한 고참이나 후임들과 술 한잔 나누는 즐거움도 있었다. 특히 잠실의 떡볶이집과 천호동 족발골목을 자주 갔다. 건대 쪽에 사는 동기도 있었기에 종종 화양리까지 가서 노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퇴근을 하면 내 방의 침대에서 불침번 서는 일 없이 온전하게 밤잠을 잘 수도 있었고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늦게까지 청취할 수도 있었다. 토요일에는 정오에 퇴근을 하면 일요일까지 온전히 내 것이었다. 그렇기에 험한 훈련이 많은 방위였지만 분명 현역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밤에 코를 골아서 고참에게 맞았다며 눈이 퉁퉁 부어있는 현역 신병을 보면 매우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복무기간조차도 12개월이 짧은 거니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지금은 현역의 복무기간이 18개월이고 입대와 동시에 제대 날짜가 정확하게 확정되는 것으로 아는데, 당시의 현역(육군)은 30개월 복무이며 입대하는 날에는 정확한 제대날짜가 특정되지 않았다. 30개월을 다 채워갈 즈음에, 소위 특명이라고 하여 제대 명령이 내려오면 날짜가 확정되고 나서야 본인의 정확한 제대일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방위들은 입대하는 날로부터 확정적으로 제대일, 즉 소집해제일이 정해져 있었다. 나는 대학생으로 학생군사교육과정을 이수하였기 때문에 열흘의 군복무 단축혜택을 받았다. 중대 인원 상당수가 대학생이었기에 단축 혜택을 못 받는 인원이 오히려 적은 편이었고, 특히 우리 동기는 10명 전원이 대학생이었기에 같은 날 제대했다.
 

여전히 그날의 상쾌함이 잔향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비록 출퇴근이 가능한 생활이었지만 제대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내 인생에 그날만큼 해방감을 느낀 날이 없었던 것 같다. 50대에 이른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온 인생길에 군 시절보다 험한 일도 많았고, 감정적으로 더 괴로운 큰 일도 있었지만, 그 시절 18개월 금곡 방위 생활도 손에 꼽을만한 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전투방위라고 했고, 스스로가 저주를 받아서 하고 많은 방위 중에 이런 보직에 걸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추억이 되니 그저 아름다웠었다는 생각이 든다. 웃기지만 얼마 전에도 재입대하라는 통지를 받은 꿈을 꾼 일이 있다. 트라우마인지 추억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열심히 해내고 싶다. 그렇게 하루씩 쌓아가는 게 인생인 것이니까 죽도록 힘들더라도 열심히 하루씩 버텨내고 싶다.
 
동기 말고도 생각나는 전우들이 몇 명 있다. 신병이었을 때 나에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준 나의 아버지 기수 고참! 내 후배였지만 나보다 한 달 고참으로써 나 대신 방패가 되어준 분대장! 나보다 늘 일을 많이 해주던 분대원들! 그리고 내가 고참이 되었을 때 신병 배치받아 어리바리했던 학교 후배!


지금 모두들 행복한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