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 1일 월요일 맑음 2140
오랜만에 0600에 수송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더라.
대청소를 실시했다. 한 달 동안 비워 두었던 막사를 청소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정비였다. 날이 따뜻해졌으니 확실히 훈련의 계절이다. 대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행군, 진지공사, 유격 등이다. 그 정도면 나의 군생활도 마무리될 것이다.
4월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나의 군생활도 계속 진행 중! 그 동안 다양한 이벤트 잘 버텼다.
1991년 4월 3일 수요일 맑음 2132
중대 복귀하자마자 바로 훈련이다.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상!
어제 밤에는 산과 들로 뛰어다녔다. 야간 전술 적응 훈련! 지난 한 달간 야간에 충분히 적응된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뛰어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느려터진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기도 하고, 이기심이 발동되어 편하려고만 하는 모습에 이를 갈기도 하고...
퇴근은 0600! 평소라면 출근 시간!! 퇴근 후에는 계속 잤다. 지금 이 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어제 이 시간에 나는, 우리는 산속에 있었으니까... 하루 동안 겪는 일이 십수 년 같다.
윤철의 입대 1주년!!
1991년 4월 5일 금요일 맑음 2129
식목일! 공휴일이 있는 주는 참 행복하구나. 게다가 내일도 반만 근무하면 퇴근이다.
어제는 동기 회식을 했다. 천호동 감자탕 골목!! 언제나처럼 즐거운 자리였다. 1년을 버텨 왔구나. 얘들아, 고생 많았다.
1991년 4월 7일 일요일 맑음 2210
1년 전과 같은 일요일 밤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시작해야만 했던 그날! 1년 전 그 밤에 내가 느꼈던 그런 기분을 지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 이제 그들은 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결국 버티고 버티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은 가슴에 묻어두고 온 몸으로 받아 들이고 밀어 붙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오늘도 무심한 척, 라디오를 들으며 군복을 다린다.
1991년 4월 8일 월요일 맑음 2125
더운 하루였다. 봄은 너무나도 짧고 바로 여름으로 향하는 것 같다. 어느 새인가 지난 겨울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토록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던 지난 겨울! 그토록 그리웠던 4월이건만 이제는 덥다고 헛소리 중이다.
1년이다. 새로운 나의 생일과도 같은 그날이 이제 코 앞이다. 1년 후 오늘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1년 후 우리의 모습은?
드디어 91-3기 신병이 자대배치 되었다. 안 그래도 쪽수 많은 3기들이 들썩 거렸다. 중대가 시끌시끌! 나도 신병 구경 좀 할까 어슬렁거리자 이현용 일병이 꺼지란다. 하하하~~
그리고 평범한 일과의 하루였다. 그런 일상에 신병들의 출현은 하나의 이벤트이다. 특히 봄 군번은 인원이 많은 편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우리에게도 아들들이 생긴다.
1991년 4월 9일 화요일 맑음 2112
하루하루가 쌓여서 어느새 1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지난 1년을 어찌 몇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어차피 지금의 이 상황이 끝나기 전에는 그저 지나가는 수많은 날들의 하루일 뿐이다. 호들갑 떨 것도 없다.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이 더 크다. 확실히 고참보다는 아랫 기수들이 더 많아진 지금! 목소리 톤은 한 단계 높아지고, 뛰어다니면서 할 일도 더 많다.
분대에 관해서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2총 사수가 된 지도 벌써 두어 달째이고, 영재, 인해 모두가 알아서 잘하니 뭐라고 할 것이 없다. 모르는 놈들이 인해가 뺀질거린다는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자기 할 일 이상을 하는데 뭐 어쩌라고?
M60 사수의 장점은 개인화기를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부사수나 탄약수들은 개인화기인 M16을 별도로 챙겨야 한다. 물론 행군 시에는 M60 은 분대원들과 분담하여 매지만, 일과 중에 나의 무기는 M60 이기 때문에 개인화기는 사수가 되면서 반납되었다.
영재는 제일 고마우면서도 미안하다. 그는 사실상 분대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분대장인 경일은 워낙 분대장을 일찍 달아서인지 이제는 습관처럼 대충대충인 부분이 있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분대장보다 더 고참같다보니 실질적으로 쫄병들 군기 잡고 뛰어다니는 역할은 재영이다. 그러면서도 사수가 되려면 경일과 내가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직도 몇 개월 더 지나야 한다.
비교적 일찍 사수가 된 경일이나 나에 비하면 사수로써 보낼 시간도 짧다. 상병을 달고 나서야 사수가 될 수밖에 없으니 지금 영재가 감당하는 몫을 생각해보면 참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참복이 없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영재를 인정해 줄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참 열심이니까 뭐라고 할 일이 거의 없다.
6개월 남았구나~~
1991년 4월 10일 수요일 흐림 2210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다.
4기가 소대별 보급계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두어 달 정도는 하게 될 것 같다. 결국은 쪽수가 많은 3기 혹은 4기가 늘 소대별로 이런저런 업무 담당이다. 육방도 있었고 하고 전출도 가는 바람에, 처음 9명으로 출발했던 우리 동기들도 이제는 7명뿐이다.
다음 주부터 2주간의 진지공사 & 행군이다. 다만 이번에는 작계 지역이 변경되어 철원까지 행군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행군 거리도 짧아지고,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돌고 돌아 행군 거리는 채우겠지만, 하루면 끝날 행군일 것이다. 부담이 많이 줄었다. 91 군번들은 복 받았네.
1991년 4월 13일 토요일 비 오다가 갬 2240
월요일부터 2주간의 진지공사! 아마도 행군 & 진지공사로는 마지막일 것이다. 강력한 희망사항! 끝까지 건강하게 최선을 다하도록... 이제는 위보다는 아래가 많아진 입장이지만 솔선수범 해야하는 짬이기도 하다.
이번 훈련은 행군보다 진지 공사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다. 행군은 하루면 될 것이다. 물론 50킬로 행군도 해보면 힘들지만 피로가 누적되고 고통이 중첩되는 상태에서 끝을 봐야 하는 200킬로와는 비교할바가 아니다. 하루면 끝날 것이고 직진으로 가면 반나절이면 될 거리이다.
이게 맞지!! 덕분에 작년 가을까지는 늘 미리미리 시행했던 예비 행군을 하지 못해도 부담이 없다. 마음이 가볍다. 어이없게도 이제는 50킬로 정도는 가뿐하다고 여겨진다. 훈련소에서 실시했던 사격장까지의 행군에도 퍼졌던 것을 생각하면 1년 동안 참 많이 단련되었다. 결국 제대할 때까지 이래저래 누적 행군 거리가 2,000킬로는 될 것 같다.
훈련은 모레부터 시작되겠지만 작전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훈련을 떠나기 위해서는 소위 싸제로 준비하는 것들이 제법 된다. 특히 먹을 것들이 핵심이다. 그래서 분대 내에서 조율하여 반찬이나 간식을 군장에 담아 가고는 한다. 그나마 신형 군장이라서 가능한 일이지만, 아직도 625 시절의 괴나리봇짐 군장을 쓰는 3,4대대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는 대대 작전병을 통해서 파악한 정보로 숙영지 근처에 미리 필요한 음식이나 비품 등을 묻고 오기로 했다. 그래서 분대별로 준비한 물품을 선발대에게 전달하였다. 오늘 오후에 우리 중대와 1 중대의 선발대가 함께 숙영지로 가서 은폐하고 오기로 했다. 과연 월요일까지 무사하게 작전은 성공할 것인가?
걸리면 군기에 갈 수도 있겠지만 연관된 인원이 중대, 아니 대대 전체이니 어느 정도는 양해가 되지 않을까? 무슨 고기를 구워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추장과 깻잎 깡통 몇 개가 전부인데.... 아님 좀 인간적으로 먹을만한 식사를 하루에 한 끼라도 제공해 주던가?
어쨌든 이제 또 다른 훈련 시작이다. 다녀오면 또 4월도 끝나 있겠구나.
1991년 4월 14일 일요일 맑음 2151
앞으로 2주간은 세탁하지 못할 군복을, 내일 하루면 이미 걸레 모드가 되어 있을 군복을 빨아서 다린다. 이제는 국방색이 아닌 녹색에 가깝게 색이 바래진 군복이 지나 온 시간을 증명해 준다. 군복 색상을 보면 대충 짬을 짐작할 수 있다.
내일 이 시간에는 나는 이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 전기도 없는 산속에서 텐트를 치고, 분대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주 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와 앉아 있을 것이다. 건강하게 다치지 않고 잘 버티고 돌아올 수 있기를...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매달릴 것이다. 회피하지 않을 것이며 잘 협업하여 내 마지막이 될 진지공사 훈련을 잘 마치고자 한다. 걱정하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실패한 적도 없지 않은가? 하면 되는 일이다.
2주 후에 봅시다 ~~
1991년 4월 28일 일요일 회색빛 하늘 2017
4월의 바람은 매서웠다. 지난 2주간 그렇게 괴롭히던 바람이었는데 집에 와서까지도 귀찮게 하는구나.
지난 2주간은 때론 가슴 아프고, 몸도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부분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2주간의 훈련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추억의 책장처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훈련 간의 파견 및 복귀 행군은 모두 주간으로 진행되었다. 확실히 주간 행군은 덜 지루하고 덜 힘들다. 생각해 보면 진지공사 시의 행군은 늘 주간행군이었다. 그동안의 파견 행군 중에 이렇게 가뿐한 이동은 없었다. 행군 거리도 짧았다. 이번 행군의 목표는 빠른 숙영지 도착인 듯했다. 다만 작계 지역으로 이동 시의 행군로는 등산 코스를 방불케 했다. 철마산을 넘는 과정에서 밧줄에 매달려 암벽오르기를 해야만 했다. 마침 군장 위에 M60을 얹고 있던 나는 후방으로 밀리며 무게 중심을 잃고 떨어져 굴렀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허리가 시큰거린다. 허리가 제대로 작살 난 느낌이다.
숙영지에 도착해서 지난 토요일에 묻어 두었던 부식은 잘 챙겼다. 묻어둔 곳이 2대대 본부 앞이어서 2대대장님에게 걸릴 뻔했다는데, 그냥저냥 넘어간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여서 봐준 모양이다.
진지공사는 훈련이고 작전이지만 결국은 노가다이다.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떼를 씌운다. 물론 전쟁 시 사용하기 위한 구조물을 만드는 일이지만, 어쨌든 사람 키만큼의 깊이로 땅을 파는 것이 첫 번째로 할 일이다.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삽질을 해대면서 포클레인으로 한 번씩만 퍼내면 하루에 끝낼 일일 텐데 하는 실현될 리 없는 공상을 했다. 그렇게 파낸 공간에 돌을 쌓아 무너짐을 방지하고 소위 떼라고 불리는 잔디를 덮어 마무리한다. 이 떼작업도 참 어이없기는 하다. 제대로 된 잔디라면 돈을 주고 사 와야 할 텐데 군대에서 그럴 리가 없다. 여기 있던 놈을 저기로 옮기는 작업이다.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비탈진 산을 타면서 단까에 돌을 나르고, 떼를 나르는 일을 일당으로 친다면 얼마가 될까? 우리는 한 달 5000원과 담배 15갑을 받고 이 일을 하고 있다. 거기에 사명감이 좀 더해지는 건가? 뙤약볕에서 그렇게 하루 종일 2주 동안 노가다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군대 오기 전에 노가다 경험이 있거나 평소에 삽질 좀 해 본 애들도 있겠지만 나를 포함해서 상당수 인원은 군에서의 경험이 사실상 첫 경험인 경우가 많다. 그나마 1년 짬으로 이제 흉내는 낸다.
그러다 보니 다치기도 하고, 일의 진도는 안 나가서 끝내는 욕을 들어 먹게 된다. 이러든 저러든 2주만 버티면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대충 눈치만 보고 시간만 때우려는 경우도 있다. 경험이 없는 인원이 많아진 중대 상황이다 보니 우리 기수에서 많이 나서야 했다. 어느덧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진지 공사! 중대 내에서 우리보다 경험이 많은 기수도 몇 명 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쫄병들도 잘 달래 가며 이끌어야 했다.
삽이나 단까가 부족하지만 보충이 되기보다는 만만한 사병들을 더 죄며 인력으로 메꿔 가려는 상황의 반복! 무언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작업 때문에 계획된 일정을 넘겨서 4월 말 혹은 5월 초까지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는 날조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 자체가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간부들은 고참을 갈구고 고참은 쫄다구들을 갈구고... 결국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아직은 넋 놓고 고참이라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고, 그렇다고 경험 없는 쫄병도 아닌 우리 기수는 중간에 끼어서 위아래로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퇴근을 하느라 거의 기회가 없지만 보름간 이어지는 집체 상황이다 보니 고참들은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군기를 잡으려 집합을 걸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그런 집합이 무서울 정도의 군번은 아니지만 고참들의 요구에 대응은 해줘야 하기에 내리 갈굼이 진행되기도 하고, 나도 불편하지만 쫄병들 입장에서는 참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정도가 심하던 아니던 일방적인 힘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우리 기수는 여전히 최고참이라고는 할 수는 없고 할 일은 더 많았지만 일과 후 눈치 안 보고 우리끼리 모이는 정도는 가능했다. 보름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먼지 속에서 뒹굴다 보니 외관은 산적꼴이고 상황은 짜증만땅이지만, 동기끼리만의 시간이 숨 쉴 구멍이 되어 주었다. 물론 이게 다 지난 1년간의 군생활로 쌓인 짬의 결과물이었다.
비록 가까운 곳이라고는 하지만 복귀 행군은 목적에 부합하는 훈련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훈련에 있어서 복귀 행군의 어려움은 체력 소진이 된 후라는 점이다. 2주간의 노가다, 불편한 잠자리 그리고 부실한 식사 등으로 중대원들의 컨디션은 바닥이었다. 출발 전에는 형식적으로 부상 인원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진짜 골절이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열외는 있을 수 없다. 이제 중대 인원 중에 200킬로 행군을 경험한 인원은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장거리 행군 시에 어떻게 해야 물집을 방지하면서 행군을 할 수 있는지, 물은 언제 마셔야 되는지 등등 사소하지만 중요한 경험 전수가 필요했다.
신병으로써 자대 배치받은 날 200킬로 행군을 떠났다는 우리 기수의 경험담은 중대 내에 현존하는 전설로, 나름 자부심이기도 하다. 불과 1년전의 일인데 참 아득하게 느껴진다. 유치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보병에게는 그런게 중요한 것도 사실이니까... 솔직히 신병 때 행군을 하 낙오를 꿈꿨다. 고참들이 무서워 감히 낙오를 할 수는 없었다. 짬을 먹게 되면서 행군은 고참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다. 분명 힘들지만 절대 질 수 없는 싸움!
주간행군은 지루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지만 뙤약볕 아래에서의 행군이다 보니 확실히 사람을 빨리 지치게 한다. 게다가 2주간의 노역은 체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도 맞다. 경험이 부족한 쫄다구들은 50 아니라 20 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혹독한 경험을 했던 나도 고참이 되고 보니 마찬가지 입장으로 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낙오가 그저 한 사람의 낙오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닦달하는 못된 고참이 될 수밖에 없다. 50킬로밖에 안 되는 거리를 M60도 매지 않는 없는 소총수들이 헥헥 대는 것을 보니 울화가 치민다. 당연히 나도 힘들다. 경험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행군이라는 것은 할 때마다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제는 고참이라고 낙오는 곧 죽음이라는 말을 내가 하게 된다. 누군가의 낙오는 결국 소대 혹은 중대 전체에 부담이다. 게다가 이 정도의 행군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그렇게 2주 만에 도착한 부대는, 이제는 정말 여기가 내 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가웠다. 도착할 때까지 흑백으로 보이던 세상이 이제야 칼라로 보인다. 가볍게 정리를 하고 샤워를 하고 늦게까지 기다린 수송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진짜 집은 따로 있구나~~
이제 사흘간의 자가 정비 기간이 주어졌고, 나의 4월은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고, 나는 지금 내 방에 누워서 행복하다. 또 한 걸음이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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